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27> 오진상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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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27> 오진상 애국지사
  • 목포타임즈
  • 승인 2013.11.25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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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진상(吳鎭相, 1862년~1909년 8월 15일)

▲출생지 : 전남 함평

▲운동계열 : 항일의병

▲훈격 : 애국장(1995)

▲공적내용

전남 함평(咸平) 사람이다.

김준(金準:이명 泰元) 의진의 호군장(護軍將) 겸 참모로 전북·전남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주권을 제약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우리 민족은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의병운동을 일으켜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출신인 오진상 역시 이러한 시기인 1906년 4월 국권회복을 이룩하겠다는 일념으로 당시 재야 유림의 거두로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최익현(崔益鉉) 의진에 참여코자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익현이 일본군에 피체되었으므로 통곡하고 남으로 내려와 김준 및 그의 동생 률(聿)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병기와 군복을 준비한 후 의병 수백 명을 모아 김준을 의병장으로 삼고 자신은 호군장(護軍將) 겸 참모로 활약하였다.

그가 속한 김준 의진은 전남 나주(羅州) 고막원에 있는 일본군 헌병대를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고, 이후 전북 고창(高昌)·창평(昌平)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이듬해인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강제 해산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말살하는 등 식민지화 정책을 더욱 가속시켜 갔다.

이에 김준 의진은 1908년 일본군을 공격하여 고위 간부 길전(吉田)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고, 그해 3월 25일에는 나주의 상박산(上博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화력과 전투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전하고 김준 의병장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진상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지속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09년 8월 15일 전남 사천(砂川) 매곡(梅谷)에서 일본군 보병 제1연대에 피체되었다. 이 때 일본군은 그를 위협하고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꾸짖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목포타임즈신문 제78호 2013년 11월 27일자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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