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18>김선중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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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18>김선중 의병장
  • 목포타임즈
  • 승인 2013.08.3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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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선중(金善仲) / 생년월일 : 확인불가

▲출생지 : 전남 영암

▲운동계열 : 의병

▲훈격 : 애국장(1995)

▲공적내용
전남 영암(靈岩) 사람이다. 박사과(朴士果) 의진에 가담하여 전남 영암·나주(羅州)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륵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륵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활동·종교활동·교육활동·학술활동 등을 통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김선중은 이같은 시기에 박사과 의진에 참여하여 전남 영암·나주군 일대에서 군수금품을 수합하고,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1909년 음력 5월경 박사과 의병장의 지휘 아래 전남 나주군 방추목(坊推木)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접전하였고, 이 때 헌병보조원 1명을 사살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2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2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목포타임즈신문 제69호 2013년 8월 29일자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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