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2015년 4월, 조지 루이스 쇼 선생 “조선의 독립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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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2015년 4월, 조지 루이스 쇼 선생 “조선의 독립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호남타임즈
  • 승인 2015.04.02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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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루이스 쇼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본강점기 당시 중국 안동에서 무역회사인 이륭양행을 운영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조지 루이스 쇼 선생(1880. 1. 25.~1943. 11. 13.)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조지 루이스 쇼는 1880년 1월 25일 중국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의 파고다 아일랜드(Pagoda Island)에서 아버지인 영국 아일랜드계 사무엘 루이스 쇼와 어머니 일본인 엘렌 오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0년 경 한국의 금광에서 회계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07년 중국 안동현(현재 단동시) 영국 조계에 위치한 단동시(丹東市) 원보구(元寶區) 흥륭가(興隆街) 25호에 무역회사 겸 선박대리점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설립했다.

선생이 설립한 이륭양행은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와 중국 이동을 돕기 위해 회사 선박 계림호를 제공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보호 지원하였다. 특히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 추진을 위해 쇼의 지원으로 안동 이륭양행 건물 2층에 교통지부 교통국(1919년 10월 17일 임시안동교통사무국으로 개칭)을 설치했다.

쇼는 이륭양행이 일본 경찰의 치외법권 지역임을 적극 활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연결하는 안전통로와 국내 전진기지로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선생은 한국독립운동 지원 사실이 드러나 일제에 의해 내란죄로 체포 구속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이후에도 선생은 정의를 위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원조하겠다고 천명했다.

1921년 1월 쇼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금색공로장을 받았으며, 이승만·안창호 등과 함께 안동교통사무국의 재 운영방안을 논의했다. 1921년 5월 김문규를 이륭양행 직원으로 채용하여 안동교통사무국을 운영했으나 1922년 8월 일제 탄압으로 김문규가 체포 되면서 안동교통사무국이 위축됐다.

선생은 1923년 상해에서 여운형·김구 등에게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할 것을 촉구했으며 한국인의 안전을 위해 노력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일본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쇼를 탄압하자 1938년 이륭양행을 복주(福州)로 이전하면서 반일활동과 한국독립운동 지원이 중단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4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신문/호남타임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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