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리차드 캐드월러더의 화상 치료 소녀 찾기 풀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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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리차드 캐드월러더의 화상 치료 소녀 찾기 풀스토리
  • 목포타임즈
  • 승인 2013.01.2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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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리차드 캐드월러더의 화상 치료 소녀 찾기 풀스토리

미국 참전용사(리차드 캐드월러더, Richard Cadwallader, 한국전쟁당시 수원 미공군부대 근무)가 한국전쟁 직후 헬리콥터를 타고 부산 군병원에서 화상치료를 받았던 한 소녀를 찾는다. 그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리처드는 수원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서해 해안의 작은 미 공군부대에 배치 받았다. 배치 받은 부대에는 공군 병사 서너 명과, 의무관, 그리고 부대에서 일하던 한국소년 서너 명이 머물고 있었다. 한국소년 중에 “에이스(Ace)”라는 별명을 지닌 아이는 미군 통역을 맡아 했다.

1953년, 어느 춥고 바람 부는 밤에 어떤 한국 여성이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딸을 데리고 치료를 해달라고 찾아왔다. 어린 소녀는 집안일을 도우려고 불을 피우다가 휘발유 통이 터져 심각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엄마와 딸은 이 부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집에서 5마일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소녀에게 붙여져 있는 붕대를 제거하고 난 군의관은 소녀가 얼굴 하단에서부터 목과 허리부분에 이르기까지 신체 전면부에 모두 심각한 화상을 입은 것을 발견했다. 3도 화상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당시 시골사람들이 화상을 치료하는 데 썼던 검정 타르 같은 것을 바르고 있었다. 군의관은 타르 같은 물질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다. 검정 타르 물질을 제거한 군의관은 화상부위를 소독하고 항생제를 바른 뒤 소녀의 몸 전체에 붕대를 감았다.

리처드씨가 기억하기로 군의관은 2시간 이상 걸려 소녀를 치료했다. 그 긴 시간 동안 한마디의 신음소리도 내지 않은 어린 소녀가 리처드에게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심한 고통을 불평한마디 없이 조용히 견뎌내는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소녀의 엄마는 딸이 고통스러워 할 때마다 계속 흐느꼈다. 군의관은 일주일 안에 딸을 다시 데려오라고 엄마에게 얘기했다. 엄마와 딸은 무섭도록 추운 그 밤에 다시 걸어서 5마일 떨어진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6주 동안 엄마와 딸은 치료를 받기 위해 매주 수요일 오후 5시에 정확하게 도착했다. 매주 군의관은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바꾸고 페니실린을 놔주었다. 소녀의 상태는 좋아졌지만 감염부위를 완전히 치료하고 흉터와 얼굴추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치료가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MASH(육군이동외과병원)소속 헬리콥터 3대가 공군부대에 착륙했다. 리처드는 한국소녀를 치료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MASH 부대 책임자인 소령에게 가서 소녀의 화상 상태를 설명하고 도울 방법이 없겠는지 물었다. 소령은 부산에 있는 미군 군병원에 화상병동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었다. “우리가 이륙하기까지 2시간 남았네. 만약 우리가 떠나기 전에 그 한국소녀를 데려올 수 있다면 내가 직접 소녀를 데리고 가서 부산 군 병원의 화상병동에서 치료를 받게 해주겠네!” 리처드는 소령의 제안이 아주 특별한 호의임을 알아차렸다.

한국인 민간인이 헬리콥터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드 월래더씨와 통역해줄 소년 “에이스," 미 해병 한명은 소녀를 찾아 나섰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소녀의 마을까지는 차로 약 45분이 걸릴 듯 했다. 소녀의 집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했고 모녀가 치료를 위해서 집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까지 가 줄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와 에이스, 그리고 해병은 지프차에 올라타 소녀의 마을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45분간 진흙탕 도로를 달린 끝에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에이스는 마을 사람들에게 화상 입은 소녀가 어디에 사는 지를 물어 소녀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에이스는 소녀의 엄마에게 부산에 있는 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면 지금 즉시 함께 출발해야 한다고 설명을 했다. 엄마는 겁에 질린 듯 했으나, 무서움을 극복하고 함께 가는데 동의했다. 옷가지나 짐을 쌀 시간도 없었다. 모두 함께 지프차에 올라탔다. 시간이 없었다. 부대로 돌아가는 길은 훨씬 더 험난했다. 차는 폭우로 인해 씻겨 없어진 도로 위에서 멈춰 섰다. 아직 절반밖에 가지 못했고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해병 병사가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리처드에게 계속 천천히 운전하라고 얘기했다. 몸집이 컸던 그 병사는 지프차 옆에 어깨를 기댄 채 차가 도로 옆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지지했다. 리처드는 계속해서 미끄럽고 원래 길이 어디인지 찾을 수도 없는 도로 위를 운전해갔고 해병 병사는 차를 계속해서 밀어 올려붙이면서 걸었다.

마침내 이들은 겨우 시간에 맞춰 군부대에 도착했다. MASH 부대는 막 이륙하려던 참이었다. 헬리콥터에 올라탄 엄마와 딸은 매우 겁에 질려있었다. 이륙하는 헬리콥터를 지켜보던 리처드는 소녀가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딸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자 했던 엄마에게 큰 존경심을 느꼈다. 리처드는 슬펐다. 아마도 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약 3개월 뒤 1954년의 봄, 리처드는 수원에 있는 다른 공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큰 군용트럭 2대 사이를 걷고 있던 리처드는 누군가 트럭 창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위를 올려다본 리처드는 깜짝 놀랐다. 화상 입었던 그 한국 소녀가 애타게 손을 내저으면서 리처드의 주의를 끌려고 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소녀는 몸짓을 하며 얼굴과 목의 상처가 얼마나 잘 나았는지를 보여주려고 애썼다. 소녀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소녀의 눈은 흥분으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소녀는 목과 얼굴을 가리키며 한국말로 크게 뭐라고 말을 했다. 리처드는 소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산에 있는 군병원에서 훌륭한 치료를 받은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화상은 완전히 나은 듯해보였고 소녀의 얼굴은 거의 정상에 가까웠다. 리처드는 소녀가 부산 군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서로 기적적으로 만난 것이라 생각했다. 리처드도 가야할 길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행복을 창 너머로 함께 나누면서 소중한 몇 분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리처드는 소녀에게 키스를 날리고 눈물을 글썽인 채 작별인사를 했다.

60년 전의 일이지만 리처드는 그 어린 한국인 소녀를 잊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녀가 생기자 리처드는 아이들에게 군부대에서 같이 일했던 에이스와 샘이라는 별명을 지닌 한국 소년들과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한국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85년도에 리처드의 딸이 미 공군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와서 살게 되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에이스와 샘을 수소문해서 찾았다. 아버지를 대신해 만난 자리에서 감동적이고 기쁜 재회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리처드와 리처드의 딸은 어린 한국소녀는 어디에 있는지 잘 살고 있는지가 항상 궁금했다.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목포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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